
비판과 반비판 사이, 공존하는 진실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나 기사 댓글을 보다 보면,
‘장기백수’나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이 꽤 자주 눈에 띕니다.
"이 나라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야"
"요즘 애들은 힘든 일 안 하려고만 해"
"세금으로 백수 뒷바라지하는 나라가 말이 되냐"
이런 말들은 익숙할 만큼 자주 등장하고, 때론 공감도 얻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 맞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보이죠.
"최저임금 받고 사람 부려먹으니 누가 일하냐"
"근무환경부터 바꿔라, 그러면 알아서 일할 사람 많다"
"노동자가 게으른 게 아니라, 일자리 자체가 비정상이다"
이런 목소리 역시 일면 타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두 입장은 얼핏 보면 서로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일할 수 있는데도 안 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용 조건이 너무 열악한 일자리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문제를 단순화하려 합니다.
게으른 개인의 책임이냐, 착취적인 시스템의 책임이냐.
하지만 이런 이분법으로는, 현실을 해결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불편한 ‘공존’을 인정하는 태도일지 모릅니다.
그래야 다음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어긋남 속에서,
무엇을 먼저 바꿔야 할까요?

문제는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는 것이다
공존하는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럼, 누가 먼저 바꿔야 하지?
근무환경이 열악하니 구직자는 안 움직이고,
사람이 오지 않으니 기업은 투자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는 이 구조.
결국은 둘 다 멈춘 채로,
“저쪽이 먼저 움직이면 나도 할게”라는 말만 맴돕니다.

어릴적 게임아이템 거래에서 많이 사용한 말이 생각나요.
'님 선'
상대방이 먼저 제시하라는 것인데요.
원하는 답이 안나온다면 거래는 불발되고 말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 대부분의 변화는 먼저 움직인 누군가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도 일단 안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낸 사람,
필요한 인재가 없더라도 인턴부터 키워보려 한 기업,
어긋난 판 속에서 먼저 한 걸음 내딛은 쪽이 결국 흐름을 바꿨습니다.
물론, 먼저 움직이는 게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을 수 있죠.
하지만 가만히 멈춰 기다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쪽이 기회를 먼저 만나는 건,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늘 이기는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이 이긴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는 구직난과 구인난 사이의 긴장은,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
서로가 조금씩 움직일 필요가 있는, 공동의 과제입니다.
이미 선택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구조
좋은 기업은 늘 좋은 인재를 찾고 있고,
유능한 사람은 늘 더 나은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꽤 빠르게 서로를 찾아내고 매칭을 끝냅니다.
어쩌면 우리가 “구직난이다”, “구인난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좋은 자리’와 ‘좋은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의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좋은’의 기준은 다를 수 있죠.
연봉, 복지, 워라밸, 조직문화…
그런 조건들을 충족한 채 서로 원하는 쪽으로 맞아떨어진 사람들 말입니다.
그 결과, 시장에는 일자리는 남아 있고, 사람도 남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원하지 않는’ 상태만 남아버린 겁니다.

회사는 말합니다.
“사람이 없어서 못 뽑는다.”
구직자는 말합니다.
“할 만한 일이 없어서 못 간다.”
서로가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는 눈이 되어버린 거죠.
하지만 남겨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가치하거나 그 일이 절망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구조 안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고,
무엇을 먼저 바꾸어야 이 어긋난 구조 안에서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
스스로 묻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왜 남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서로 얼마나 달랐는가?
남은 자리에 남겨진 이유는 서로 달랐다
같은 ‘남은 자리’ 위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구직자는 스펙이 부족해서,
어떤 이는 방향을 잃어서,
또 어떤 이는 이미 너무 많은 거절을 겪은 끝에
자신을 낮게 바라보게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어떤 기업은 단지 연봉이 낮아서,
어떤 곳은 조직 문화가 너무 경직돼서,
또 어떤 곳은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루던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지원자가 외면한 상태로 남겨져 있습니다.
같은 ‘미스매치’지만, 원인은 다르고 속도도 다릅니다.
그러니 그 상태만 보고 서로를 탓하면,
평행선은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직자는 회사의 조건만 보고 외면하고,
회사는 지원자의 태도만 보고 실망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결과만 보고 말합니다.
“이래서 요즘 구직자는 문제야.”
“이래서 중소기업은 가기 싫은 거야.”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본다면,
서로를 남겨지게 한 ‘맥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이 어긋난 구조 속에서 처음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좋아진다’는 환상
“지금은 아니야.”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이런 조건으론 못 해. 언젠간 괜찮아지겠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어본 적 있을 겁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세상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나만 억지로 움직이는 게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다림이 상황을 나아지게 해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
그나마 남아 있던 기회조차 사라지곤 합니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고, 사람들은 앞서 나아가고,
세상은 내가 준비되기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작정 아무 일이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 갖춰지면 시작하겠다’는 태도는,
결국 시작 자체를 무기한 미루는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현실은, 기다려서 오는 기회보다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기회가 훨씬 많습니다.
가만히 멈춰 서 있는 사람보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사람이
더 많은 풍경을 보고, 더 많은 선택지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인 사람에게,
진짜 좋은 자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회는 움직이는 사람 쪽으로 기운다
기회는 공평하게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움직이는 사람 쪽으로 더 자주, 더 빠르게 기웁니다.
이력서를 한 번 더 내본 사람,
거절당해도 다시 일어선 사람,
지금 당장 마음에 들진 않지만 도전해본 사람에게
생각지 못한 연결이 생기고,
우연처럼 보이는 변화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쟤는 운이 좋았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운 좋은 사람’은
대부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운이 좋아서 구직에 성공 하지 않습니다.
눈에 띄진 않지만, 반복해서 문을 두드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누군가인 거죠.
내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이의 노력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기회란 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움직여야 시야가 트이고,
시야가 트여야 선택지가 보이고,
선택지가 생겨야 진짜 기회가 시작됩니다.
물론 첫 시도에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보다 반 걸음 앞서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반 걸음이,
시간이 지나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 차이가 쌓이면, 나중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 그냥 한 번 해본 게 내 인생을 바꿨더라고요.”
환경을 바꾸는 건 외침보다 ‘참여’
우리는 종종 세상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일터가 더 공정했으면,
조직문화가 더 인간적이었으면,
최저임금이 현실을 반영했으면.
그 바람은 너무나도 정당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외칩니다.
이건 불합리하다고,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외침이 닿지 않는 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환경을 바꾸는 데 가장 강한 힘을 가지는 건,
그 환경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상사에게, 동료에게,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걸 실제로 개선하려 할 때,
비로소 변화의 물꼬가 트입니다.
밖에서 비판하는 건 필요하지만,
안에 들어가서 행동하는 건 훨씬 더 큰 파급력을 가집니다.
실제로 많은 직장 내 제도 개선이나 복지 확대는
그 안에 있었던 누군가가
참고 견디며, 또는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딛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돌아옵니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서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환경이 나를 바꿔주길 기다리는 대신
내가 환경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
그게 진짜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바꾸는 질서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사실 누군가가 현실을 감당해내며 싸워 얻어낸 결과입니다.
정시 퇴근, 탄력근무제, 육아휴직,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
이 모든 건 그저 ‘좋은 제도’여서 생긴 게 아니라
누군가 현실 속에서 버티며,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겁니다.
물론 그 현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불공정한 대우, 낮은 임금, 일과 삶의 균형을 깬 조직문화,
모두가 “그냥 그런 거지 뭐” 하며 참아오던 것들입니다.
그 틀 안에 먼저 들어가
조금씩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삶을 바꾸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조금 나은 환경’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그 질서를 바꾸고 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건 영웅적인 한 사람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현실을 딛고도 포기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묵묵히 쌓아올린 변화의 흐름이 이룹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냥 싫다고, 나쁘다고, 안 간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질서도 바뀌지 않는다.”
먼저 그 자리로 들어가서
무너진 현실 위에서라도 일어서려 한 사람만이
새로운 기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좋은 인재를 놓친 건 기업의 책임도 있다
사람이 없다는 말,
요즘 기업들 사이에서 정말 흔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지원자가 없다”,
“요즘 젊은 애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 한다”,
“면접까지 해놨더니 안 나온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인재가 ‘없는’ 걸까요,
아니면 '떠난' 걸까요?
많은 기업들이 사람을 못 구한다고 하소연하지만,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지원자가 떠난 이유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낮은 급여, 일방적인 업무 지시,
야근이 일상화된 조직문화,
성장보다 통제에 집중하는 관리자,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를 품기 어려운 분위기.
좋은 인재가 왔다가 떠났다면,
문제는 구직자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기업의 자세, 문화, 조건에도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일을 하러 오는 사람에게
“너는 왜 이것도 못 하니?”가 아니라,
“어떻게 도와주면 잘할 수 있을까?”를 묻는 문화.
단기 성과만 보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사람을 길러내려는 태도.
이런 기업은 사람이 몰립니다.
심지어 처음엔 조건이 조금 부족해도
“저기라면 버텨볼 만하다”는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조직은 사람을 떠나게 만든 적 없었나?”
남은 인재 속 ‘가능성’을 끌어내는 노력
‘좋은 인재는 이미 없다’
이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핑계입니다.
이력서 한 장, 면접 몇 분 만으로
사람의 가능성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지금 남은 인재들이
진짜 능력이 부족해서 남은 걸까요?
아니면 한두 번의 기회를 놓쳤거나,
제대로 길러주는 곳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빛나지 못한 걸까요?
기업이 정말 사람을 찾고 있다면,
이미 완성된 사람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미완의 사람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걸 꺼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부족해 보여도
시간과 기회를 주면
회사와 함께 자라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볼 줄 아는 기업이 결국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은
사람을 단기적인 ‘성과 도구’가 아니라
긴 호흡의 ‘동반자’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조직에선 사람이 떠나지 않습니다.
성장과 배려가 함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조직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좋은 인재’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좋은 인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을까
우리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상황을 탓하거나, 남을 비교하거나,
외부 요인을 들여다보는 건 익숙한데,
정작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도,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왜 아직 이 자리일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이고,
나는 지금까지 뭘 시도했으며,
그 시도 속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왔는가.
이건 나를 자책하자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더 유연하게 바라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좁게 정의하거나,
과거의 실패에 묶여서
가능성을 축소시킨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때 안 됐으니까 지금도 안 될 거야."
이런 생각들은 사실,
확신이라기보다 두려움의 다른 얼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타 인지는 그걸 들여다보는 힘입니다.
내가 어떤 패턴을 반복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멈추고 도망치는지,
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찰’하는 능력.
이 능력이 생기면,
실패도 피드백이 되고,
정체도 전략이 되며,
지금 이 자리도 출발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자리,
혹시 그냥 익숙해서, 혹은 두려워서 멈춰선 자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구조를 탓하기 전에 나를, 나를 탓하기 전에 구조를
우리는 문제를 마주하면
어느 한쪽을 먼저 지목하고 싶어집니다.
“이 구조가 잘못됐어.”
“나라가 이 모양이니까.”
혹은 반대로,
“내가 못난 탓이야.”
“내가 노력을 안 했던 거지 뭐.”
그 둘 다, 익숙하고 편한 판단입니다.
책임을 밖으로 밀어버리거나,
반대로 나를 몰아붙이기만 하면,
그 순간은 마음이 잠시 가벼워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둘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갖는 일입니다.
정말 구조가 문제였다면,
나는 그 구조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는가?
반대로 내가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맥락과 배경 속에서 반복된 것이었는가?
이런 식의 ‘이중 관점’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됩니다.
구조만 탓하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자기만 탓하는 사람은 무너져버립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비판보다 통찰, 자책보다 방향성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었고,
그 환경이 나에게 어떤 선택지를 주었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찬찬히, 그러나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일.
그게 바로
다음 발걸음을 조금 더 똑똑하게,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하게 내딛게 해주는 힘입니다.
먼저 움직이는 자가 기회를 만든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자리는 이미 다 찼어.”
“괜찮은 회사는 안 뽑아.”
“이제 남은 건 별로야.”
그 말엔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이상적인 매칭은 끝났고,
지금 남은 자리들은 어쩌면 기준에 못 미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춰버리면,
남은 기회조차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분명히 변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기 위해
실제로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움직이는 사람만이 경험이라는 이름의 자산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은 단지 기술과 스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실패도, 낯설음도, 적응도, 갈등도
모두 나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됩니다.
결국, 기회를 만든 사람은
늘 먼저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먼저 부딪혀보고,
먼저 실패했고,
먼저 다시 일어났던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주변에는 조금 더 나은 기회가 놓여 있었고,
그걸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움직이는 사람부터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지금 이 구조가 잘못됐다.”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변하려면 큰 개혁이 필요하다.”
그 말, 맞습니다.
구조는 분명 바뀌어야 하고,
누군가는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어야 할까요?
크고 멋진 변화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오늘 한 걸음,
어제와는 조금 다른 선택,
그게 바로 변화의 시작입니다.
지금 이 구조 안에서,
지금 이 조건 안에서,
움직이려는 사람,
그 사람부터 질서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백수로 남아 있는 사람도,
사람을 구하지 못해 답답한 기업도,
서로가 조금씩 움직일 때, 그 틈 사이로 연결이 생깁니다.
완벽한 시기란 없고,
이상적인 환경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사람,
그 사람이 결국
자신의 자리도, 구조의 일부도 바꿔냅니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사람은,
늘 거창한 누구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실을 딛고 ‘한 걸음’ 내디딘 사람입니다.

전체 글 요약
이 글은 ‘장기 백수’와 ‘열악한 근무환경’이라는 이중적 사회 문제를 다루며,
구직난과 구인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적 불일치를 이야기합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자리는 이미 서로를 선택했고,
남은 자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서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긋남을 해결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기다림만으론 기회가 오지 않고,
현실을 딛고 참여하는 사람만이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기업도 인재를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개인도 자기 성찰과 움직임을 통해
스스로를 시장 안에 다시 놓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균형 있는 시선을 제안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은,
장기 백수를 향한 비판에 “근무환경부터 바꾸라”는 반론이 달린 것을 보면서였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래도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그래야 환경도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또 하나는,
좋은 자리는 이미 매칭이 끝났고,
남은 사람과 남은 일자리 사이에서 생긴 오해와 침묵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도 탓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조금씩 움직이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왜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할까?"
그 물음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요.
글을 마치며
이 글은 누군가를 탓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백수를 변명하려는 것도, 기업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어긋난 구조 속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멈춰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현실은 쉽지 않고, 변화는 느립니다.
하지만 변화는 늘 먼저 움직인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머무는 이 자리에서
한 걸음만 옮겨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어쩌면 나 자신뿐 아니라
이 구조 전체를 바꿔나가는 작은 시작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어긋나 있고,
그 어긋남을 탓하기도 바쁩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쪽으로
작게라도 먼저 움직여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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